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보물상자 11 - '새 날'
    스토리박스/[단편]상자 (The Box) 2013. 6. 6. 18:46



    여인은 확연히 빛나는 시선으로 구슬의 남자를 돌아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포즈로 양팔을 슬쩍 벌리며 
    구슬의 남자 앞에서 천천히 한 바퀴 돌았습니다.

    "이것 보세요.. 
    당신이 나에게 무슨 일은 한 건지..^^!!
    단지 제 피부나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라..
    제 마음이... 아.. 표현할 수 없어요...
    더 단단해졌지만, 딱딱한 건 아니고..
    더 기쁘지만, 경망스럽지 않고..
    더 행복하지만, 이 마음을 표현하기엔 '행복'이란 단어는 마치 먼지처럼 느껴지네요..
    아--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네..?^^ 말씀해 주세요~
    제가 얼마를 지불하면 되지요..?"

    여인은 기쁨의 춤을 추듯 율동감 있는 움직임으로 돌며 걸으며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당신의 온전한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군요..^^"

    "아니라뇨~ 선물은 구슬만으로도 충분해요~ 
    지금 보니 정말로 이쁘네요~^^
    말씀해 보세요.. 제가 어떻게 갚아 드릴까요.? 
    그 기름은 얼만가요..?"

    "아가씨..^^ 아가씨라 부를게요.. 괜찮죠..?^^
    만약 당신이 갚아야 하는 것이었다면, 
    그건 선물이 아니라 재앙이 되었을 거예요.."

    "네..?! 무슨 말씀인지...??"

    "당신은 오늘 이 시장에서 있었던 일을 알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그 '구슬'이나 이 '기름'의 가치를 알지 못하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당신이 이것을 갚으려 든다면..
    당신의 나머지 인생은 이전보다 더 힘든 나날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그냥 받으세요.. 선물이에요.. ^^"

    "... 또 어려운 이야기를 하시네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
    왜? 제 화구들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거죠..?"

    "아마도 그건.. 
    그 화구들은 이미 온전한 상태였기 때문일 거예요..
    이 기름은 그저 '온전케 하는 기름' 이거든요..
    당신은 원래의 모습.. 
    그러니까.. 당신의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 같아요.."

    "이게 원래 내 모습.. 이라고요..?"

    여인은 자신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다시 만져 보았습니다. 
    거울이 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녀의 손에 느껴진 감촉은 이전의 어떤 사람에게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부드러움이었습니다. 

    "정말로.. 제가 아름다운 가요..?"
    ( 이 여인은 사실 '아름다움'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본적도 느껴본 적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음...."

    구슬의 남자가 주저하자..
    바닥에 주저앉았던 연장의 노인이 끼어듭니다. 

    "여인이여.. 당신은 참으로 아름답소..!
    내 비록 지금은 이런 몰골로 전락했지만. 
    한때는 어느 누구보다 더 다양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알 수 있었소.."

    노인은 말을 이을수록 목이 매어졌습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에게는 말이오....
    꽃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향기가 있고..
    당신에게는 산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굳건함이 있고..
    당신에게는 바다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위용이 있고..
    당신에게는 태양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따스함이 있고..
    당신에게는 시간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영속성이 있소..

    심지어 그 모든 것은 매 순간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매 호흡마다 새롭고도 완전하게 창조되고 있는 듯 하오..
    내 눈을 깜빡이는 순간이 저주스럽게 느껴질 정도 라오..!"

    노인은 이미 절규하고 있었습니다. 
    깊이 패인 주름마다 눈물이 스며들어 그 메마른 골짜기를 적시고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환희가 노인을 빠르게 잠식해가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몸을 급히 고쳐 앉아 구슬의 남자를 향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짐승의 발바닥 같은 거친 두 손으로 남자의 바지가랑이를 움켜 잡았습니다. 

    "내 무례함을 용서하시오.! 
    그리고 이 벌레 같은 인생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그 기름 한 방울을 내게도 베풀어 주시오..!"

    "영감님..."

    구슬의 남자가 노인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하게 자세를 낮추어 주었습니다. 

    "알아요..! 알고 있소..! 
    그 기름의 가치를 알고 있소.'
    내 나머지 인생 전부를 당신의 종으로 살겠소..! 
    내 생명을 드리겠소..!
    그러니..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시오..! 제발..!
    내게도 그 '아름다움'을 다시 허락하시오..! 
    나를 변화시켜 주시오..!
    제발 부탁이오..!
    어흐흐..ㅠㅠ"

    노인은 오열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시장 사람들 조차도 노인의 절규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어 흐흐흐..ㅠㅠ"

    노인의 손은 남자의 바지 위에 바위처럼 붙어있었습니다. 

    "영감님..."

    여인이 친절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 여인의 목소리는 어떤 악기가 내는 선율 같았습니다. 

    "제가 보기엔 영감님에게 이 기름은 필요치 않은 것 같아요..
    영감님은 이미..."

    "무슨 소리요..!"

    노인은 여인에게로 차마 눈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그 지극한 아름다움 앞에 자신의 견고한 의지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어떤 수모를 겪으며 내 생명과도 같은 그것을 내려놓아야만 했는지..!
    당신은 알지 못하오..!
    내 이마와 손에 이 슬픈 짐승의 표식이 세겨지기 이전에.. 
    그 시간으로 돌아가야만 하오..!"

    노인은 남자에게 더 강하게 매달렸습니다. 

    "제발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오..!!
    어윽윽흑...ㅠㅠ"

    말꼬리가 잘린 여인이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영감님...
    대신 제가 영감님을 위해 그림을 그려 드리면 어때요...?"

    난데없는 여인의 제안에 노인은 눈물범벅인 얼굴로 여인을 올려다보았습니다. 

    "...?! 그림..! 무슨...??"

    여인은 자신의 스케치북과 펜을 들고 
    손님을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아름다운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이 앉자 더 이상 의자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대신 의자는 여인으로 인해 
    태초부터 있었던 '존재 이유'를 되찾은 것만 같았습니다. 
    잠시 동안 여인을 둘러싼 모든 시간이 멈춘 듯했습니다. 
    그리고 스케치북 한 장을 뜯어 노인에게 건넸습니다. 

    "!... 이.. 이건.."

    "영감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죠...?^^"

    ".. ㅠㅠ..."

    노인은 그림을 가슴에 품고 아무 말 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아차.. 영감님.. 그림을 잠깐만 돌려줘 보세요.. 
    제가 마무리해야 할 것이 있네요..^^"

    너무나 아름다운 위엄에 노인은 순복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떨리는 젖은 손으로 여인에게 그림을 다시 건넸습니다. 
    그림을 받아 든 여인은 그림 아래쪽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습니다. 

    "제 싸인이에요..^^ 이건 선물이니까.. 제 마음을 담아 드린다는 의미로~^^"

    정말이지 여인의 목소리는 마치 천상의 음악을 타고 맑게 흐르는 냇물의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고마워요... ㅠㅠ 정말 고마워요.."

    사람들은 늘 의뢰받은 그림만 그리던 여인의 그림이 몹시도 궁금했습니다. 
    그림은 '꽃' 이었습니다. 

    여인의 손에서 노인의 손으로 전달되는 그 순간..
    여인이 사인한 자리에 푸른색 불이 붙었습니다. 
    모두가 놀랄 틈도 없이 그 푸른색 불은 순식간에 종이를 삼켜버렸고,
    그리고 노인의 손에는 이제껏 누구도 본적 없는 꽃 한 송이가 들려있었습니다. 

    여인을 비롯한 모두가 이 마술 같은 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때 구슬의 남자의 호탕한 웃음이 멈춰버린 주변 공기를 다시 흔들었습니다. 

    "아- 하하하..^^ 
    아~ 그래서 당신의 화구가 '재생 화구' 이군요..!"

    "여인이여...! 이 꽃을 어떻게..?!! 
    오직 나만이 알고 있고 내려갈 수 있었던 그 잊힌 나라의 그 '절망의 계곡' 
    가장 깊은 곳에 피는 꽃.. 
    하지만 세상 어떤 꽃보다 더 아름답고, 
    더할 나위 없는 큰 위로와 지극한 평강을 주는 이 꽃..
    어찌 알고 있었던 것이오..!!?"

    "^^ 설명하긴 어렵지만..
    영감님의 마음이 보였어요..
    아니.. 제게 외치고 있었어요..^^
    저는 말하시는 대로 그려내는 재주가 있거든요~^^"

    여인은 구슬의 남자를 돌아보며

    "선생님~~ 이제 저는 
    제게 있는 재능과 이 화구로
    해야 할 일을 알게 된 것 같아요..! ^^"

    구슬의 남자가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기도 전에 알아버렸군요~ 
    폼 잡고 멋들어지게 제안해 드리려 했는데..^^
    당신은 이미 그 선물을 충분히 누릴 준비가 되었군요..^^
    이미 당신은 제게 그 은혜를 갚은 셈입니다..^^"

    노인이 두 사람 사이에서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고맙소.. 젊은이들..ㅠㅠ
    나도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똑똑히 깨달았소.. 
    내게 아직 그 '절망의 계곡'을 내려갈 힘이 거뜬히 남아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이오..
    오래전 나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내려가던 그 길을 
    기꺼이 기쁨으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소..!"

    말을 잇는 노인의 얼굴에 그 깊이 패인 주름들이 
    노인의 환희를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습니다. 

    좀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노인의 얼굴에는 
    기이한 모양의 꽃이 피는 것처럼도 보였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구슬의 남자의 선물. '온전케 하는 기름'.
    그 기름에는 향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향기는 세상의 먼 동쪽 끝 이 작은 나라 작은 시장에서 은은하게 퍼졌습니다. 

    시장 사람들에게는 오늘 하루가 천년같이 길게 느껴졌습니다. 
    천년이 걸려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자신들의 삶을 지탱하던) 마음속 바위산에 작은 균열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붙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루 해가 지고 다시 아침이 되니 
    '새 날'이 되었습니다. 




    (계속....)




































    조수연 作


    '그의 펜' (2013. 5)


    22*27.5cm, 종이 위 펜







    2013/06/13 - [연재소설/보물상자 season.1] - 보물상자 12 - '선물...!'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