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보물상자 9 - '연장의 노인'
    스토리박스/[단편]상자 (The Box) 2013. 5. 28. 00:32




    값을 따질 수 없는 진귀한 보물상자를
    거저로 얻게 된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 나이 때에 그의 부모님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적힌 황금빛 메모와 함께 그 상자를 선물 받았습니다.


    상자는 태어나는 순간 모두에게 지급되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서로 같은 것을 가지지 않았고, 
    이 세상 그 누구도 타인의 것을 뺏거나 훔칠 수는 있어도
    결코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루가 지나면 연기가 되어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서로가 합의한 대가를 지불하거나,
    소유한 사람의 뜻에 따라 무상으로 타인에게 증여는 가능합니다.
    이 상자의 개봉과 내용물의 처분 방식은 전적으로 
    상자의 소유주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이 노인의 상자에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는..) 가위'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과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각종 '칼', '집게', '낫', '망치', '모루', '톱'... 등 금속 연장들이 가득했습니다.   


    이 특별한 가문의 연장들은 결코 망가지거나 닳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가문의 남자들 외에는 누구도 다룰 수 없는 
    어마어마한 무게 탓에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을 전수받아야만 
    쓸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인의 상자 속 연장은 단 하나도 팔 수가 없었고, 
    추가되는 유산 때문에 대를 이을수록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만 졌습니다. 

    노인은 자신의 '가위'와 다른 연장들을 들고 
    한평생을 세상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연장이 되어주었습니다.

    노인의 상자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무거웠습니다. 
    몇 해전부터는 더 이상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어 
    사슬로 칭칭 동여매어 끌고 다녔습니다. 
    노인이 지나는 길 위에는 상자 속 절그렁 거리는 연장들의 마찰음과 
    노인의 주름만큼이나 깊이 패인 자국이 그가 지나간 길 위에 공허하게 남았습니다. 

    노인의 이마와 미간에는 마치 문신으로 새겨 넣은 것 같은 
    깊고 짙은 주름이 있었고,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자갈이 박혀있었고, 
    손바닥은 거친 광야를 내달리는 짐승의 발바닥같이 두껍고 메말라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노인의 상자보다 노인의 마음이 더 무거워 보였습니다. 

    노인도 한때는 꽃을 참 좋아하는 소년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꽃들과 특별한 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꽃이 풍기는 향기와 빛깔로, 크기와 감촉으로.. 
    서로 어울리는 꽃들의 관계를 알 수 있었고, 
    특정한 향기들이 조합될 때 주는 마음의 평안함을 알고 있었고, 
    꽃마다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대부분의 시간을 꽃과 함께 보냈습니다. 

    상자 속 가장 작고 빛나고 다른 연장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위'는 
    꽃을 만지는 소년에게 더할 나위 없는 연장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연장이었습니다. 

    소년은 이 특별한 취향 탓에 삼촌들과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이웃 어른들께 숱한 욕을 먹었습니다. 

    "사내 녀석이..!!"
    "꼬츄 떨어져..!!"
    "뭐가 되려고..! 계집애같이..!!"

    소년은 꽃이 좋았지만.. 꽃 때문에 늘 욕을 먹는 자신이 미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꽃을 향해 마음이 가는 스스로에게도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내 녀석이..!! 뭐가 되려고...!!!'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을 다니며 
    연장이 되어주는 삶을 시작하면서, 꽃들의 향기도, 
    꽃들이 서로에게 주고받는 대화들도, 
    그들이 주는 평안도 더 이상 느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긴 시간이 흘러 혼자가 된 노인은 셀 수 없는 많은 나라를 다니며 
    타인의 연장으로써의 삶을 살았습니다. 
    때로는 전쟁에 동원된 적도 있습니다. 

    노인은 늘 혼자였습니다. 
    보통은 아들을 낳아 2대나 3대의 남자들이 상자를 나눠 들고 다녀야 했지만, 
    노인은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은 이 고통의 무게를 자식에게 전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오늘도 먼길을 걸어 새로운 장터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천근만근 지친 몸을 앉히고 싶었습니다. 
    멀리 작은 무덤 옆. 임자가 없어 보이는 아름다운 의자 하나가 보였습니다. 
    참으로 쉴만해 보였습니다. 

    '절그렁. 지익-- 절그렁. 지익---'

    몇 걸음 힘겹게 옮기는 중에 한 남자가 먼저 그 아름다운 의자에 앉았습니다. 

    '제길....'

    그래도 임자 없는 의자니까 남자에게 부탁을 해볼 참이었습니다. 

    '절그렁. 지익-- 절그렁. 지익---'

    노인이 다가가자 이번엔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무덤과 의자 위 남자를 
    둘러싸며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어차피 자신의 연장을 시연해 보이려면 사람들을 모아야 했는데, 
    노인에겐 왠지 선물 같은 인파였습니다.

    '절그렁. 지익-- 절그렁. 지익---'

    어느 틈에 노인도 사람들 틈에서 의자 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별구경거리가 아니었는데.. 노인은 몹시도 의아했습니다. 
    노인은 사람들을 등으로 헤치며 뒷걸음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불쑥..! 
    하고 무덤에서 허연 뼈가 튀어나왔습니다. 







    2013/06/03 - [연재소설/보물상자 season.1] - 보물상자 10 - '노인의 시선'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