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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소 명 - 헤아림
    청년백수,'예수'를 만나다./7. 소 명 2010. 9. 2. 11:3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슬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슬림이니

    거슬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1~2]



    예수님을 알고 성경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구절을 만나게 되었다.

    위에 있는 권세들이 뭘까? 인상부터 별로인 대통령과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때 되면 난투극을 벌이는 국회의원들, 먼저 이런 위인(?)들이 생각났었다.

    어디까지가 내가 순종해야 할 대상일까?

    가끔씩 하는 온라인 게임에서 한 유저가 대화 창에 쓴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명박의 새우 눈 팝니다..."

    사람들은 무슨 새로운 아이템인가 해서 관심을 가지며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글을 올린 사람은 우리나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쏟아 낸다. 사람들은 동조 하기 시작한다. 4대 강 사업, 세종 시 문제, 용산 참사, 아이티 구호활동 까지...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낸다.

    ‘대통령’이라는 권위는 어떻게 확보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에 첫 줄에 명기된 글이다. 대통령이라는 권위는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합법적으로 획득된 적법한 권위이다. 국민의 다수의 뜻이 모아져 선출된 사람이며, 지위이며, 권위이다. 하지만, 그가 선출되는 것이 국민 모두의 뜻이 아닐 수는 있다.


    대통령을 비하한다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를 악평하는 것과는 좀 다른 성격을 띠는 것이다. 그것은 적법하게 선출된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고, 우리나라 헌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라의 근간인 대한민국의 국민 됨을 부정하는 것이고 국가가 국가로써 존립하게 하는 그 근간을 부정하는 사람이므로 그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거나, 아니기를 자청하는 사람일 것이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고, 비난하는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중 대부분은.. 자신이 하면 좀 더 나을 거라는 착각을 많이 한다. 사실 그런 착각은 때로는 삶의 중요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순복 하고, 존경을 표하고, 이해해주고, 더 나아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노력이 가상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나온 정당한 주권(主權)이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권리행사를 통해서 우리 손으로 그들을 뽑았다.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은 사람들도 법에서 허락된 적법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므로, 투표를 하지 않았건, 다른 탈락 후보에게 소중한 한 표를 주었든 간에, 우리는 선출된 대통령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충분한 예우를 할 의무가 있다.

    투표권이 없는 미성년자도 예외일 수 없다.

    자주권이 있는 우리의 영토에서 우리의 헌법에 의거하여, 우리 '국민'이라는 자격을 가진 자들 전원이 각자의 권리행사를 통해 동의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법한 절차에 의해 획득된 권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우리의 후배들, 자녀들, 학생들에게 본을 보여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사람이 하는 일이라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잘못 판단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부당하게 잘못 결정할 수도 있다. 비난을 쏟아놓는 대신 응원을 하고 격려를 하고 바른 방법으로 조언을 하는 것이 조금 더 나은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럴 때만이 나 또한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써, 선생님으로서, 상사로써의 권위도 확보되는 것이다.

    사실. 진짜 고통은 적법하지 않은 과정으로 세워진 권위로부터 나오는 권력이다. 우리는 이미 경험한 적이 있고, 우리의 형제는 아직도 그 고통을 겪고 있다.

    세워진 권위가 적법하다면, 그에 대한 적절한 예우를 갖출 때 그 권위로부터 적절한 보호를 받을 수도 있다.


    적법한 권위에 부적법한 방법으로 항거하는 경우 거의 예외 없이 큰 사회적 고통을 맞게 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마가복음 4:24]


    이 단순 명료한 명제는 친구 사이, 부부 사이, 그리고 가끔은 신호를 위반하고 만난 교통경찰관 앞에서 가장 유용하게 증명되었었다.

    그리고, 이 명제의 적용되는 범위는 놀랍게도 하나님과 나의 관계까지였다.

    하나님을 내 수준에서 제약해서 온전히 도우시는 분으로 헤아리지 못하면, 하나님도 그런 나의 ‘헤아림’만큼만 내게 일 하신다. 하나님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 헤아리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헤아린다면, 그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헤아림과 천국 백성으로서의 헤아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판단’과 ‘정죄’함이 아니라, 각자의 부르심의 자리에서 서로를 존중해 주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이 땅에 사는 동안 주어진 진짜 ‘소명(召命)’ 이었다. 




    2010/09/02 - [† 청년백수, '예수'를 만나다./7. 소 명] - 30. 소 명 - 달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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